#0 두루마리



:77 비상연락망
:76 사가
:75 연명부
:74 넷째 대담
:73 직사광선
:72 채형주
:71 지나는 길마다
:70 어째서 아직도 이곳에
:69 이곳은 우리는 유리의 연계로
:68 이곳에 대해 말해 버리기
:67 시작하는 일
:66 불의 논리 - 계속 교정
:65 불의 논리 - 자세 교정
:64 불의 논리 - 두뇌 교정
:63 불의 논리
:62 이것은 하나의 악몽이 아니고
:61 담배의 요정을 추억함 (하)
:60 하나에 정신을
:59 담배의 요정을 추억함 (중)
:58 담배의 요정을 추억함 (상)
:57 사가의 관 속
:56 리버 2
:55 여기에 모여 우리는
:54 성현
:53 야경꾼
:52 재판장 풍경
:51 재앙 재생과 정신 파탄
:50 화자 대리의 삶이 어떤 것인지 말해 버리기
:49 셋째 대담
:48 조상 모양의 사자
:47 우리는 친구가 아닙니까
:46 자살전도자
:45 슬픔신
:44 꿈속의 사단
:43 팔짱
:42 점퍼의 서기보
:41 점퍼의 형사
:40 바로 이렇게
:39 너희 쓰레기들아
:38 한 나
:37 모험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36 리버
:35 1번 캐비닛
:34 신이 오기 전에
:33 요정이 울면서
:32 포고문 초안
:31 불가해한 경우
:30 신자
:29 시간을 끄는 동안
:28 복도를 또 지나며
:27 성난 이들이 몰려와
:26 계원서한
:25 위원회
:24 정리7
:23 개 같은 시간을 넘어서
:22 한 나의 그림자
:21 준비가 되었나이다 하고서
:20 우리는 이곳을 영혼이라 부르지 않는다 / 왜냐
:19 오오 대화하지 맙시다 이곳에서
:18 영전을 껴안고
:17 명령서
:16 신사
:15 반분선문서
:14 정리7
:13 둘째 대담
:12 영전
:11 사령부
:10 지경
:9 십이 일이 지나서
:8 박명에 배낭을 연다
:7 복도를 지나며
:6 강령1
:5 영전의 모습
:4 첫째 대담
:3 하혜희
:2 인사계원
:1 방치된 사령부



:1 방치된 사령부

사령부는 와해되었고 재건은 요원해 보인다. 적도 야심도 탁자도 없고 지도도 잃었다. 둘러보면 이곳은 풀밭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풀들은 제대로 꽂혀 있고 고개를 들자 평화가 있다. 방치된 사령부 풍경 안에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방치된 사령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런 것은 없었는데, 그런 것은 없는데. 평화 말이다. 평화는 원래 이곳에 없고 그런 풍경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하늘을 보라. 전선이 가로지르고 있지 않은가? 아니다. 거대한 것과 전혀 그렇지 않은 것들이 동물과 같이 눕거나 서서 멋대로 이곳을 기어 다니고 있다.


:2 인사계원

단 한 명의 인사계원이 사령부 터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그의 꺼진 듯한 눈에서 우리는 언젠가 그것을 찾아낼 수도 있으리란 불안감에 휩싸인다. 근무명령서다. 언젠가 그것이 우리를 구분해 줄 것이다. 우리를 너와 나로 만들고, 우리 사이에 순서를 부여할 것이다. 시간이 모두의 머리 위에 흐르도록.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인사계원은 이제 막 잠에서 깼을 뿐이다. 아주 오래 앉아 근무했던 곳에서 이제 막 나온 것 같다. 아닌 듯도 하다. 방금 막 인사계원은 생겨났다. 이 계원을 여럿이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 아닌 듯도 하다. 계원은 머리를 긁으려다가 만다. 계원은 하품을 하려다 만다. 이곳의 모두는 모두와 면식이 있다. 그런 연기는 일절 통하지 않는다. 계원이 어떤 허튼 짓을 하자마자, 모두는 노골적으로 도망칠 준비가 되어 있다.


:3 하혜희

여럿 중에서, 태초에 혜희가 있었다. 혜희는 왜 하필 자신이 골라졌는지 불만을 갖지 않는다. 혜희, 나갑니다! 같은 힘찬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그림이 나올 줄은 몰랐네요, 말하고 혜희는 웃는다. 혜희는 잘 웃는다. 자기에게 남은 유일한 일이라는 듯이 그렇게 한다. 혜희를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혜희는 배지를 받아든다. 이거 꼭 달아야 하나요? 배지에는 검은 배경에 흰 선으로 한 나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혜희는 받고, 단다. 그것은 이제는 망해버린 사령부의 공식 화자 대리 배지다. 혜희가 똑바로 서서 웃음을 터뜨린다. 거울이 없어도 혜희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이런 어리석은 것은 또 언제 만들었답니까? 또 언제까지 떠들어야 합니까? 우리는 찾아나설 것입니다, 우리는 저 짐승들을 꿈에서 건져내 참호에 처박아버릴 것이고, 이럴 것이고 저럴 것이고, 아무튼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의례는 이 정도로 합시다. 그간 많이 했으니. 다짐 많이 했으니.


:4 첫째 대담

혜희와 계원이 인사를 나눈다. 계원의 준비는 철저해서, 의자는 세 개 마련되었다. 하나는 당신의 것. 여기서 본 것에 대해 어디서든 발설하지 마십시오. 계원의 처음 말이다. 혜희는 누구한테 하는 소리냐고 물으려다 만다. 이 계원은 성실한 편이군, 혜희는 대신 누구부터 찾아가면 되느냐 묻는다. 계원의 손에는 너덜너덜한 연명부가 들려 있다. 앞으로 나서야 할 모두의 이름이 여기에 적혀 있습니다. 우리는 사령부를 재건할 것입니다. 아니 그건 알고 있고, 그러니까 누구부터 찾아가면 되냐고, 계원은 안경을 고쳐 쓴다. 생각해 둔 바가 있습니다. 혜희는 그런 뜸 들임이 다 좀 못된 습속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한다. 그렇습니까? 이렇게 해서 무엇이 나쁩니까? 혜희는 나쁜 것들을 읊는다. 첫째로 도무지 시작하질 않는다는 점, 둘째로 사령부의 권위에 의심을 품게 만든다는 점, 셋째로 동력을 소진시킨다는 점, 넷째로... 알겠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들으세요. 이것은 재건이 아닙니까? 언제나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이래서는 재건이 아니지. 우리가 이렇게 초장부터 싸우는 것은, 그러니까 재건이 아닙니까? 아냐, 그게 아니야, 아니야, 아닙니다, 맞습니다, 아니지, 이래서는 나도 당신도 시작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수행을 하십시오. 내가 알려줄 것입니다. 나는 몹시 피로합니다. 제가 할 일을 찾기로 알아서 마음먹은 것부터가 피로한 일이란 말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협박하는 거야? 아닙니다. 아닙니다. 여기까지 하십시다. 여기에 데려오십시오. 그러니까 누굴? 한 나입니다. 한 나를 찾아서 데려오십시오. 개소리! 그건 못해!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영전을 찾으십시오. 영전은 한 나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 겁니다. 그 개는 아무것도 모를걸. 하지만 괜찮은 것 같아. 좋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첫 번째 합의입니다. 계원은 영전의 모습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5 영전의 모습

영전은 털이 흰 개입니다. 눈두덩이 유독 짙으니 알아보기 쉬울 것입니다. 영전은 크지도 작지도 않습니다. 일어선 채로는 만질 수 없겠지만 허리를 굽히면 가능합니다. 말로 이야기하십시오. 영전은 인간의 말을 할 줄 모르지만 알고는 있습니다. 상냥하게 대해 주십시오. 그런 갭니다.


:6 강령1

그게 다야?
그게 답니다.
다 아는 거잖아.
저도 압니다. 알고 모르고를 더는 언급하지 않기로 합시다. 많은 것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말을 덧붙이겠습니다.
아 그거 좋네.
혜희는 흥얼거리며 신발을 준비하고 모자를 준비한다. 모두 검고 튼튼한 것들이다.
얼굴을 가려야 할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배낭에 다 들어 있을 것입니다.
혜희는 캐비닛을 닫고 계원과 악수를 나눈다.
느낌이 좋아. 거의 처음인 것 같은데.
저도 그렇습니다. 나가면 명령서를 먼저 확인하십시오. 아무것도 믿지 말고 현혹에 맞서십시오. 사령부는 나와 당신으로부터 재건됩니다. 나는 전에 어떤 사전 공작도 펼치지 않았습니다. 벌써부터 도망치는 이들이 있을 것이며, 우리의 적들도 분명 준비를 시작합니다. 당신은 무서운 것이 없고, 우리의 결의는 강력합니다. 이제 당신은 가고 나는 남습니다. 우리는 갈라집니다.
계원은 이제 입을 다물고 혜희를 노려볼 뿐이다. 우리는 갈라진다. 그 말대로 되었다.


:7 복도를 지나며

이런 복도는 언제 만들었던가. 혜희는 이전 사령부에서도 본 적이 없다. 복도 벽면을 따라 그림과 사진들이 붙어 있다. 모두 예전에 본 적이 있는 것이다. 도대체 취향이랄 게 없군. 담배 요정의 그림 앞에 혜희는 잠시 선다. 복도를 지나자. 복도를 지난 다음에 배낭을 열어보자. 내가 받은 것을 살펴보자. 혜희는 배지를 만지며 복도를 지난다. 안녕하신가! 안녕하신가! 그림은 외친다.


:8 박명에 배낭을 연다

박명에 혜희는 배낭을 연다. 먼저 큰 보가 나온다. 풀밭에 펼쳐 둔다. 해진 남색 천에 흰색 이국 글자가 빼곡하다. 깃발처럼도 보인다. 벌써부터 불길하군, 그리고 손바닥만 한 조개껍데기가 있다. 조개껍데기? 그것도 꺼낸다. 모두 꺼낼 것이다. 연명부 사본, 담배 두 갑, 빈 필름통이 차례로 나온다. 하나같이 곰팡이 냄새가 난다. 숨을 참으며 혜희는 속으로 되뇐다. ...우리는 사령부를 재건할 것입니다... 이따위 잡동사니를 갖고... 비단끈과 두루마리. 양손에 들고 번갈아 보며 말한다. 아름답군요? 둘에는 아무 무늬도 얼룩도 없다. 다음은 육포, 밧줄, 향초, 찻잎. 지랄이군. 혜희는 담배 하나를 물고 불을 찾는다. 불은 없다. ...재건할 것입니다. 그리고 은 로켓. 뭔지 모를 금속 조각이 들어 있다. 욕을 하고 싶지만 들을 이도 없고, 혜희는 불이 나올 만한 뭔가를 찾는 데 집중한다.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 베개. 베개로 뭘 어쩌라고? 베개는 멀리 던져버린다. 불을 주십시오! 불을 달라고 간절히 원하면 불이 있을 것임을 혜희는 알고 있다. 다만 짓궂은 불, 악마 같은 불을 보게 될 것이다. 일테면 번갯불을. 이런 세상이다. 그게 있었으면 한다. 그게 이름이 뭐지? 로이타? 라이트? 타라트? 그것의 이름을 떠올리려 애쓰며 배낭을 뒤지던 혜희는 윤기 흐르는 활비비를 꺼내 잠시 보다가 부러뜨린다. 볼펜. 열쇠. 마른 풀이 부서져 들어 있는 천 주머니. 주머니를 뒤집어 털어내고 거적때기 위에 던진다. 누군가의 옆모습과 외국 문자가 양각된 메달. 완전히 봉인된 정방형의 검은색 플라스틱 상자. 흔들자 소리가 난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주머니가 하나 더. 메모장. 글씨는 알아보기 힘들다. ...섯, 것? 것입니다? 전할 것입니다? 채전할 것입니다? 주머니 하나 더. 주머니가 또 하나 더. 각각 칼과 지우개가 들어 있다. 배낭 밑바닥에서 혜희는 비누와 라이터를 찾아냈고, 그리고 깃발 위에 누워 새벽별이 깜빡이다 사라지는 것을 본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 아래에 있게 될 것입니다. 되뇐다.


:9 십이 일이 지나서

벌써 십이 일이 흘렀다. 혜희는 풀밭을 지나 헤매고 있다. 거적을 뒤집어쓰고 지경 근처에서 헤매고 있다. 남은 길은 지경 근처로 난 것뿐이었는데, 지경 밖으로 나는 길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에게 왜 이러십니까! 방향을 다시 잡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지경이라고 하면,


:10 지경

지경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안과 밖이 있고 지경이 있다. 지경은 단지 높은 벽이었던 적도 있었고 울타리였던 적도 그어진 금이었던 적도 있었다. 지경은 우리가 있는 한 항상 있고, 그것이 없어진 경우와 함께는 이곳의 그 누구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없으면 사령부는 물론이거니와 우리도 없다. 대부분의 우리는 그런 확신을 공유한다. 지경은 피부였고, 따라서 우리와 지경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 그 점에 대해서는 우리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몇몇만이 부정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만약 지경에 다다라 고개를 들면 저마다 다른 광경을 볼 것이다. 그러나 지경이 어떻게든 있다는 것만은 안다. 겨우 그렇게 합의한다. 악한들은 저마다 우물거리며 혼자 중얼거릴 뿐이다. 그런 것은 없다... 지경이 어느 이상으로 높아지면 우리는 도관 속이었고, 머리 위에 빛 구멍 하나만 뜬 밤이었다. 혜희는 그렇게 본다. 도관 속에서 기도와 같은 소리가 울린다. 이 지경 근처에서 우리는 정신을 잃는 경향이 있다.


:11 사령부

사령부의 권위는 불파이고 불멸입니다. 그것이 닿는 곳 어디서나 무소불위이며, 그것에 도전할 수 있는 것은 매 순간 전에도 후에도 없습니다.


:12 영전

정신을 잃은 혜희는 인사계원의 꿈을 꾼다. 어둠 속에서 계원이 뭐라 말한 것 같았지만, 곧 개 짖는 소리와 인간의 목소리를 분간할 수 없다. 개의 꿈인지도 모른다. 계원이 길게 말한 듯도 했고 개가 웅얼거리는 듯도 했다. 계원이 젖은 손으로 혜희의 손을 잡은 듯도 했고, 개가 코를 처박는 듯도 했다. 계원의 손이 왜 젖어 있는가? 무엇으로 적신 손인가?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 말하자면 색깔을, 이 어둠 속에서. 혜희는 관통된 듯한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얼굴을 찡그린다. 손은 젖어 있고, 개는 혜희를 내려다보고 있다.


:13 둘째 대담

혜희는 사령부가 재건되는 것을 느끼며 곧장 두려워진다, 맞습니까? 맞습니까? 아닙니까? 영전은 대답하지 않는다. 영전은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혜희는 질문하지 않았다. 나는 당신을 처음 봅니다. 제 생각보다 당신은 영민해 보입니다. 당신이 보입니다. 개는 재색이었다. 유독 털빛이 짙은 개의 눈두덩이 씰룩인다. 제 말뜻을 알아듣겠다면 왼 앞발을 드십시오, 아니라면 그저 개처럼 구십시오. 당신이 알아듣지 못한 척을 하면 나는 기분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다시는 찾지 않겠습니다. 재건 같은 것도 없겠지요. 나도 두려움이란 것을 압니다. 제 말뜻을 알겠습니까? 아시겠습니까?


:14 정리7

이곳의 것들은 이곳으로 정리7이 들어올 수도 있다는 소문을 듣는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도, 그래야만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는 이야기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정말로 그렇게 물었다간 열띤 논쟁과 비난, 고성, 멱살잡이 끝에 붉어진 얼굴로 씁쓸하게 돌아서 헤어지고 말 것이다. 카페나 술집이 이곳에는 최근 많이 생겼다. 모두 망할 것이다. 그런 곳에 모여드는 종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정리7은 귓속말로도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혹시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정리7은 뭐냐?


:15 반분선문서

라는 것이오. 소위 말이지. 요즘엔 다들 그 얘기뿐이오. 신사가 혜희 옆에 앉으며 말한다. 혜희는 신사가 건넨 잔을 들이켠다. 이 개는 당신 개요? 개는 혜희의 발치에 몸을 말고 누워 있었다. 개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당신은 누굽니까? 혜희가 되묻는다. 그것이 혜희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신사는 팔을 걷어붙이며 말한다. 나로 말하자면, 당신이 누군지 아는 사람이라고나 할 것이오. 재건이 시작되었다는 불길한 이야기, 사자가 벌써 이 지경까지 와 있다는 이야기, 돌이킬 수 없다는 이야기, 곧 위원회가 만들어지리란 이야기, 그런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들로 이곳은 시끄럽소. 그런데, 어떻소 당신은? 직접 들어 보고 싶소만. 할 말 없습니다. 모두 사실이고 사자는 이제 사령부로 돌아갈 겁니다. 그 개와 함께? 혜희는 대답하지 않는다. 정리7에 대해선 궁금하지 않소? 그딴 건 당신 같은 뜨내기들이나 좋아하는 문제 아닙니까. 있지도 않은 것에 이름을 붙이고. 아무래도 좋지 않습니까. 호오, 심기를 어지럽혔다면 용서하시오. 하지만 흥미가 있을 거요. 반분선문서 말이오. 소위 말이지.


:16 신사

당신의 말이 옳소. 실은 없는 것이지. 그러나 마찬가지 아니겠소? 당신이나 나나 이름이 그래도 있소. 늦었지만 소개하리다. 나는 신사요. 신사라고 부르시오. 신사는 은혜도 모욕도 반드시 갚소. 신사는 나서오. 신사는 챙기오. 신사는 도망치지 않소. 놔두지도 않고. 신사는 옷도 입고 수염도 기르지. 그래서 신사요. 신사는 챙길 수 있는 건 전부 챙기오. 그래서 이것도 챙겼지. 신사는 품에 손을 넣어 편지봉투 하나를 꺼낸다. 이거요. 정리7이요. 모르긴 몰라도 사령부가 들썩일 만한 문건이오. 나 같은 뜨내기들이 말하는 바로는, 네즈롐 이후 최대라고 하지. 아? 네즈롐 이후 최대가 쓰레기란 뜻이라고? 그거야 당신 생각이오. 사령부 생각은 다를 거요. 내 생각이 맞다면 당신은 혜희일 거요. 맞소? 맞을 거요. 맞아야 말이 되니까. 그리고 당연히 임무도 받았겠지? 그럴 거요. 그게 맞지. 명령서를 보여 달라고는 안 하겠소. 나한테는 이게 있고, 당신은 이것이 필요하고, 나는 당신에게 이걸 주고 싶소. 나는 신사요. 나를 기억해 주시오.


:17 명령서

신사는 그렇게 말한다. 혜희는 배낭에서 메모장을 꺼내 한 페이지를 찾아 찢어낸다. '이것은 첫 번째 정식 명령서입니다. 영전을 만나고, 지경에서 문서를 가져오십시오. 당신이 영전을 찾아내거나 영전이 당신을 찾아낼 즈음엔 그 문서에 이름이 생겨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름이 둘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여하간 찾아서 가져오십시오.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문서는 편지봉투에 담겨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 나타나 당신에게 그것을 주거나, 아니면 당신이 그것을 찾지 못하게 방해할 것입니다. 누군가 죽더라도 가져오십시오. 이 쪽지가 이 사령부의 것임을 이 메모로 보증합니다.' 혜희는 뒷면에 쓴다. 혜희가 이 명령서를 입증용으로 사용하였음을 이 메모로 보증함. 나중에 사령부로 들고 가십시오. 신사답지는 못한 거래입니다만. 이것이면 된다고 봅니다. 그것으로 되었다. 혜희는 편지봉투를, 신사는 메모를 손에 넣었다.


:18 영전을 껴안고

달리는 혜희가 있다. 혜희는 영전을 껴안고 달린다. 발을 놓을 때마다 등에 배낭이 세차게 부딪친다. 배낭에 등이. 지경이 무너집니다. 어째서? 이런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어째서 상상도 하지 못했지? 이곳 일을 어찌 알겠습니까. 어찌 알지 못했지? 알지 못한 혜희가 달려간다. 이건 다 계원이 괜히 불길한 소리를 써뒀기 때문이다. 누가 죽더라도? 무슨 소린가. 혜희는 생각을 그만두고서 달리기에 집중하고 싶다. 영전아, 이제는 어떻게 하겠니. 왜 이 모양일까요 이곳이란! 누구와 얘기하는 겁니까, 아니 누구에게? 그것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입니까? 영전아 너는 본 적이 있지?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겠지? 이렇게 이곳이 잘려나가는 것을 너도 봤었지? 그렇지? 영전은 혜희의 품속에서 더 단단히 몸을 만다. 영전의 발에 가슴이 밀리는 것 같다. 가슴에 발이. 발이 가슴을. 가슴을 발이. 영전이, 혜희가.


:19 오오 대화하지 맙시다 이곳에서

나를 좀 그냥 둬라. 나한테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나한테 대답도 하지 말고. 어떤 시답잖은 말도, 특히 시답잖은 말을 나한테 하지 마. 아무 할 말이 없다. 할 말이 없다는 말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이곳의 약속은 약속 같지도 않은 약속이고, 그것은 바깥을 닮은 것이지만, 이곳은 그보다 빠르고 약하다. 이곳은 하루아침에 있다가 하루아침에 없기를 반복한다. 깨지는 것이 가능해야만 약속이라면 이곳의 약속은 깨지기조차 못하는 것이다. 이곳은 말이 통하는 곳이다. 말이 통하는 곳이기에 그렇다. 우리가 차라리 총이나 몽둥이를 들고 있더라면, 아니면 정말 밥이라도 만들어 먹어야만 할 수 있다면. 자야만 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죽을 수만 있다면! 이곳을 부르는 단어를 알고 있다. 우리는 이곳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고 있어. 오오 우리는


:20 우리는 이곳을 영혼이라 부르지 않는다 / 왜냐

들을 준비가 되었느냐 묻자
들을 준비가 되었나이다 하고
그런데 무엇을
그런데 무엇을

그런데 무엇을

말할 준비가 되었느냐 묻자
말할 준비가 되었나이다 하고

준비가 되었느냐 묻자


:21 준비가 되었나이다 하고서

영전아 너는 어째서 말하지 못하니
어째서 못하니
할 수도 있을 텐데
왜 배우지 않니
그러지 않았니 왜
순한 개야
이런 때에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네가
나한테 말을 걸어준다면
얼마나 좋겠니 물어볼 텐데 네게
누가 죽을까, 너와 나 중에
하고 물으면 네가 대답을 해주고 나는
그대로 하면 참 좋을 텐데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너는 절대로 인간의 말을 못하고
나는 그만 인간이고 싶다
누가 죽는 편이 낫겠니 어느 쪽이 좋겠니
그리고 혜희는 쓰레기 더미 위로 쓰러진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물을 준비가 되었는데
그리고 으스러지는 것은 쓰레기, 쓰레기들


:22 한 나의 그림자

가 혜희를 덮친다


:23 개 같은 시간을 넘어서

혜희는 다시 사령부에 있다. 가져왔어. 가져오셨습니까. 가져왔어. 혜희는 영전의 앞발을 들고 있다. 오랜만이라면 오랜만에 보는 계원은 조금 더 초췌해졌다. 계원은 편지봉투를 벌려 내용물을 확인한다. 계원이 안경을 벗고 눈을 비빈다. 한 나와 만났습니까. 만났어. 뭐라고 합니까. 혜희는 입을 다문다. 영전의 앞발은 혜희의 손에 쥐여 있다. 뭐라고 합니까. 계원의 눈은 충혈되어 있다. 너희를 전부 죽일 거래. 계원이 다시 안경을 쓴다. 영전의 발을 본다. 그것은 얼룩이나 흠결 없이 잘려 있고, 누가 보아도 잘 만들어진 공예품 같다. 영전이겠습니다. 그래. 잘 돌아오셨습니다. 잘 돌아왔어.


:24 정리7

적은 자살이다. 우리는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해 왔고, 이곳이 있는 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한, 그 생각은 다시 도착하고 만다.


:25 위원회

그것이 정리7의 첫 두 문장이었다. 계원은 이제 머리가 깨질 것 같다. 그것을 다시 접어 편지봉투에 넣고,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물을 마신다. 정리 같은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계원이 내려놓은 컵에는 물이 조금 남아 있다. 컵은 종이로 만들어진 것이다. 편지봉투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오로지 지경에서만, 오로지 영전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계원의 안경알에 물방울이 튀어 있다. 물방울은 아주 느린 속도로 흘러내리는 중이다. 우리는 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계원은 편지봉투 위에 주소를 적는다. 펜은 계원이 물고 있던 것이었다. 위원회는... 적으면서 한 말이다. 계원은 겉에 주소가 적힌 편지봉투를 혜희에게 주고, 그 전에는 다 쓴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었다. 가지고 가십시오. 우리는 사령부를 재건할 것입니다. 혜희는 영전의 발을 계원의 책상 위에 놓고 편지봉투를 받아든다. 계원은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6 계원서한

사령부에서 모두에게 씁니다.
먼저 슬픈 소식을 전합니다.
하나, 우리의 오랜 적 한 나가 돌아왔음을 알립니다.
그리고 하나, 우리의 친애하는 동지였던 영전의 사망을 알립니다.
우리는 동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령부의 권위는 무소불위입니다... 사령부의 권위는... 닿지 못함과 이루지 못함이 없습니다... 뭐라고 할까요. 이렇게 합시다. 침착하십시오. 울지도 마십시오. 잠시라도 나가 바람을 쐬고 오십시오.
사령부의 권위는 무소불위입니다. 사령부의 권위는 불파이고 불멸입니다. 그것이 닿는 곳 어디서나 무소불위이며, 그것에 도전할 수 있는 것은 매 순간 전에도 후에도 없습니다.
이제 약간 덜 슬픈 소식을 전합니다.
사령부의 가장 강력한 사자이자 모든 화자들의 대리인 혜희가 당신 앞에 있을 것입니다. 즉시 그 사자에게 응분의 차를 대접해 주십시오. 이것이 사령부의 첫 번째 명령입니다
우리 사령부는 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재건위원회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동참시킬 것입니다. 위원회는 이미 첫 번째 회의를 마쳤으며, 그 결과 당신 앞에 사자가 있는 것입니다. 재건위원회의 두 번째 회의는 당신이 오는 즉시 시작됩니다. 부름에 응답하십시오. 이것이 사령부의 두 번째 명령입니다.
사령부는 그 누구보다 투명하게 사태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침착하십시오. 울지도 말고.
이 서한이 사령부의 것임을 이 글로 보증합니다.
글자가 흔들려 미안합니다.


:27 성난 이들이 몰려와

풀밭에서 소리를 지른다. 그들은 혜희를 내놓으라고 한다. 박수를 치고 박자를 맞추며 구호를 외친다. 둘 셋, 하고 함께 함성을 지르기도 하고, 손 잡고 원을 만들어 풀밭 위를 돌기도 한다. 그들은 혜희의 목을 원하고 있었다. 왜 저러는지 알지 너는? 알고 싶습니까? 그다지. 그런데 어떨까, 진짜로 내가 나가면. 모를 겁니다. 저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겁니다. 기껏해야... 성난 이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사령부의 권위는 불파이고 불멸이며... 그렇게 시작하는 노래였다. 한 나가 돌아왔다는 걸 이미 모두가 압니다. 더 지체할 수 없습니다. 연명부에서 당신이 아는 이름부터 찾아가십시오. 알고 계시듯 편지는 복사할 수 없습니다. 조심하십시오. 그래. 장난 같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그래. 복도에서 두 번 꺾으면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시간을 벌 테니 조용히 빠져나가십시오. 그래. 넌 이제 뭘 하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시간을 벌 겁니다. 어떻게? 묻지 마십시오. 저는 어떻게 되지 않습니다. 그런 걸 걱정하는 건 아냐. 알고 있습니다. 당신도 필요하다면 하게 될 것입니다. 뭘? 걱정을? 농담할 시간이 없습니다. 재미없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웃어본 게 언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없겠지. 있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그래. 혜희는 계원에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고 나간다. 그것이 닿는 곳 어디에서나...


:28 복도를 또 지나며

혜희는 복도를 두 번 꺾었다가 출구를 찾지 못하고 다시 두 번 꺾어 처음 꺾었던 곳으로 돌아왔다. 이따위 복도를 만든 게 누군가. 혜희는 담배를 꺼낸다. 혜희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혜희 앞에는 액자가 걸려 있다. 푸르스름한 철로 만들어진 액자다. 담배요정그림이 액자 속에 있다. 요정은 항상 묘사되는 그 모습에, 그림 밖으로 기어나오려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복도에는 조명이 없고 창문이 있다. 요정의 둥근 눈구멍은 항상 그렇듯 칠해지지 않았다. 요정의 몸은 항상 그렇듯 옥색이고, 요정의 손에는 불 붙은 담배가 있고, 항상 그렇듯, 불편한 자세로 뭔가를 제안하고 싶어하는 눈치다. 혜희는 담배를 털어 끈다. 그리고 다시 복도를 두 번 꺾어볼 참에, 두 번의 외침을 듣는다. 안녕하신가! 안녕하신가!


:29 시간을 끄는 동안

만취했던 이들이 깨어나고, 숙취 가운데서 회의는 계속된다. 풀밭은 푸르스름한 연기로 자욱하고, 연단 위의 계원은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여 달라는 듯한 얼굴로 말하고 있다. 계원은 기침도 하지 않고, 목을 고르지도 않고, 그 누구에게도 말할 시간을 주지 않고 계속 말한다. 자신이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는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며, 당장이라도 좋으니 제발 자신을 죽여 달라는 듯한 이야기를 끝도 없이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한 채 머리 아파하고 있을 따름이다. 계원이 이야기하고 있을 따름이다.


:30 신자

얼굴이 붉은 사람이 품에 포도주병을 껴안고서 혜희에게 부딪친다. 제 몸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취한 이 사람은 풀린 눈으로 허공을 더듬다 혜희의 창살 같은 시선과 마주치는데, 혜희는 표정 없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으며, 혜희의 가슴팍에서는 표정 없는 얼굴이 그려진 검은 배지가 빛나고 있다.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신 이 사람은 약간의 두려움을 이겨내며 혜희에게 묻는다. 당신은 천사이십니까? 혜희는 이 사람의 손목을 붙잡고 말한다. 내가 너를 죽이거나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지만, 너는 나를 모욕하지 말라. 아! 그렇다면 당신이 혜희입니까? 취한 이는 크게 눈을 뜨며 크게 외친다.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로 가십니까! 많은 이들이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몇 분 전까지 사령부 마당으로 밀고 들어와 혜희의 목을 내놓으라고 외치던 이들 중 하나였고, 혜희는 이제야 그를 알아보는데, 그는 사려 깊은 손짓으로 진한 녹색의 단단한 술병을 건네고 있으며, 술병에는 아무 술도 남아 있지가 않다. 혜희는 취한 이의 손목을 놓는다. 혜희는 눈을 내리깔며 인사한다. 신자도 그렇게 한다.


:31 불가해한 경우

방해하지 마라 이 멍청한 것아!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신자가 고개를 돌려 보니 벽에 걸린 그림 속에서 담배의 요정이 제법 위엄 있는 자세로 성을 내다가, 신자의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곧장 다시 혜희 쪽으로 얼굴을 돌린다. 요정의 두 눈의 면적비와 위치와 계란 모양의 머리에 칠된 음영이 바뀌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게. 내가 잘못 들었는가? 뭘 걸고 뭘 하겠다고? 혜희는 요정에게 대답한다. 다시는 감히 나한테 다시 말하라고 하지 말고, 신자에게도 사과하는 게 좋겠는데. 요정의 눈이 다시 신자에게 향했다가 다시 혜희에게 향한다. 신자는 취한 채로 요정의 말을 계속 듣는다. 그게 정녕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게 정녕 무슨 뜻인지 너는 생각해 봤느냐? 혜희는 신자에게서 빈 병을 받는다. 나는 생각 같은 거 안 해. 생각은 계원이 생각이란 것을 해 봤겠지. 너야말로 생각이란 걸 해보는 게 어때. 너를 여기 걸어두고 내가 여길 지나가게 한 게 무슨 의미인지. 무슨 의미인가? 정말 몰라서 물어? 너와는 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나와는 대화하지 않는다? 너는 고지받을 뿐이야. 내가 무슨 선택을 해도 무관하다는 뜻인가? 그래.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 무관하고, 너는 네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뜻이야! 여기서 안녕하신가! 안녕하신가! 하고 나를 두 번이나 네 번이나 부를 필요가 이제 전혀 없다는 뜻이야. 너와는 더 이상 거래하지 않는다는 거야! 네가 불태워져도 이제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도 네게는 불태워지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뜻이야! 우리에겐 도무지 그럴 필요조차 없다는 뜻이야! 혜희는 병목을 쥐고 벽을 쳐 병을 깬다. 날카로워진 부분을 담배의 요정에게 보여준다.


:32 포고문 초안

우리는 결정했습니다. 우리에게 이제 담배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없습니다. 모두 대비하십시오. 바로 지금 당신의 마지막 담배를 꺼내십시오. 마지막 담배를 입에 무십시오. 마지막 불을 붙이고, 이것을 계속 읽으십시오. 마지막 연기를 뿜으면서, 끝까지 읽으십시오. 끝까지 읽은 다음에 마지막 담배를 끄고, 우리는 결심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는 이제 담배를 피우면 자살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살을 걸고 금연을 합니다. 이 포고문이 당신에게 끝까지 읽히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렇게 됩니다. 포고문의 마지막에 <끝.> 이라고 써둘 것입니다. 동요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자살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담배를 피우고 있으므로, 차분히 준비할 시간이 있습니다. 원한다면 지금 맨 위로 올라가 다시 읽어도 좋습니다. 우리는 어쨌든 끝까지 읽습니다. 사령부의 권위는 무소불위이며, 재차 알립니다, 우리에게 자살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적은 자살이며, 그것은 매번 돌아오는데, 그것과 우리는 싸울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든 가장 바라 마지않는 것을 그 싸움에 걸 것입니다. 그것은 담배이고, 이것은 농담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령부의 첫 번째 포고문입니다. 포고문 초안입니다. 이 초안을 우리는 그대로 끝까지 읽을 것입니다. 수정은 없을 것입니다. 자살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말을 번복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끝까지 읽으십시오. 사령부는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결정했습니다. 이것은 사령부로 몰려온 성난 이들에 의해 인준된 포고문입니다. 우리는 자살도 원하고 담배도 원하며, 이제부터 둘 다 하지 않습니다. 이 포고문이 사령부의 것임을 이 글로 증명합니다. <끝.>


:33 요정이 울면서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어찌 내게, 너희가- 너희가, 라고 요정이 말하는 순간 섬광과 함께 요정은 사라지며 은단 수십 개가 벽으로부터 소리도 없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을 뿐이다. 혜희는 까르륵 웃음을 터뜨리고 몇 개를 주워 먹는다. 소리를 내기에는 너무 가볍구나, 너무 가벼워! 취한 신자는 그 옆에 주저앉는다. 신자는 은단들 은단들을 본다. 이 모든 일이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혜희가 은단을 까드득 깨무는 동안에, 신자는 요정 대신 울기 시작한다.


:34 신이 오기 전에

혜희는 품에서 서한을 꺼내 신자의 눈앞에 들이민다. 신자는 감히 손을 움직이지 못하는 채로 눈으로만 그것을 읽는다. 읽기를 마친 신자가 다시 혜희를 보자, 혜희가 울고 있는 신자의 어깨를 한 번 짚어 준다. 서한은 접혀 다시 혜희의 품속으로 들어간다. 혜희가 그렇게 하고, 당신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을 용서하십시오, 신이 오기 전에, 혜희가 그렇게 말하고 신자의 곁을 떠난다. 신자는 쏟아진 은색 알갱이들 위에 엎대어 빈 액자를 부여잡는데, 일들은 다 신이 없는 동안에 일어난 것이다. 이 참담함, 신자는 눈물과 콧물을 흘리면서 웃고 있고, 바로 그런 점, 자신이 웃고 있다는 점이 신자를 점점 더 슬프게 만들고 있다.


:35 1번 캐비닛

캐비닛은 사무용 서류나 물품 따위를 넣어 보관하는 장이다. 철로 만들어진 직립식 상자로, 사무실 바닥에 놓고 쓴다. 사령부에는 1번 캐비닛이 놓인다. 계원은 가끔 그 모서리에 발가락이나 팔뚝을 찧고,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얼굴을 찡그리며 욕을 내뱉는다. 계원의 욕은 그 누구도 들은 적이 없다. 계원은 절대로 누구에게도 욕을 들려주지 않는다. 그 욕이 어떤 욕인지 계원을 빼면 아무도 모른다. 한편 1번 캐비닛은 열린 적이 없어도 그 내용물과 내용물의 내용을 모두가 초능력을 가진 듯이 안다. 열린 적이 없어도 내용이 있고, 내용물도 있는 것이다. 계원도 그걸 안다.


:36 리버

캐비닛이 넘어진다. 혜희는 다시 바깥에 있다. 너희를 다 죽일 거라고 했었지? 말이 없는 한 나가 팔을 한 번 휘두르자 풀밭 위의 군중들이 연기처럼 흩어진다. 계원은 난간을 붙든다. 광풍이 계원의 짧은 머리칼을 헤집어 놓고 있다. 혜희는 배낭을 뭄쪽으로 더 꽉 붙이며 어둠 속으로 숨어들고 있다.


:37 혜희의 모험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혜희의 모험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믿기 어렵지만.


:38 한 나

여기 우리가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의 소개를 간단한 상상으로부터 시작해 보자. 이곳은 가는 빛만이 새어 들어오는 방이고, 그 빛에 기대어 이곳에 인간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엔진이 하나 놓여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이 엔진은 자신 내부에서 복잡하게 꼬인 여러 직경의 도관들과, 그보다 더 복잡하게 얽힌 전선의 그물망을 따라 전달되는 전기적 신호를 통해, 어떤 특정한 연료를 통제 가능한 동력으로 바꾸는 능력을 갖췄으며, 그래서 우리가 비로소 이렇게 엔진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이 엔진에는 인간의 것과 다름이 없는 눈이 달려 있었고, 인간의 것과 다름이 없는 시선으로, 이 엔진은 자신의 시선이 닿는 모든 곳으로부터 자신의 연료를 유추해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단지 어디에든 눈길을 한 번 던지는 것만으로도 이 엔진이 자신의 작동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갖출 수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엔진은 닳거나 지치지 않고, 극도로 견고하며, 자신의 행정을 수행하는 데에 있어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이 엔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자신이 놓인 바닥과 자신의 이마를 가로지르고 있는 가는 빛을 지금 이 기계는 끝없이 노려보고 있다. 빛은 조금씩 움직여 방의 한쪽에서 한쪽으로 가며, 빛은 점점 약해지다가 사라진다. 엔진은 이제 어둠을 노려보고 있지만, 엔진이 만들어내는 회전력에는 아무 이상도 없다. 몇 시간이 지나면 빛은 다시 있고, 그때에도 역시 엔진의 작동에는 아무 이상과 변화가 없다. 엔진은 노려볼 뿐이며, 노려보며 빛과 어둠에 대해서만, 자신에 대해서만, 방에 대해서만, 안과 밖에 대해서만, 볼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다. 아무 쓰임도 없이. 그리고 도대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를 수많은 날들, 시작마저 잊어 버릴 만큼 너무나 기나긴 정적이 흐른 뒤에, 그러나 엔진에게는 단 한순간에 불과했을 어떤 사이 후에, 엔진은 급기야 자신의 회전력 속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이다. 일으켜 조금 열려 있던 문을 마저 열고 그대로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다. 여기 우리가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었다. 한 나를 먼저 이렇게 소개해 본다.


:39 너희 쓰레기들아

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너희는 잊었느냐? 내가 너희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거는지 잊었느냐? 내가 무엇인지 잊었느냐? 나는 대체 너희에게 얼마나 더 큰 힘을 보여줘야 할까? 너희는 얼마나 더 한숨지어야 할까? 잊었느냐? 잊었느냐? 부족한가? 부족한가? 부족했겠지! 내 말이 이곳에 울리는 것을 들어라. 내가 입을 벌리지 않고도 말할 수 있고, 내가 손을 움직이지 않고도 너희들의 이마마다 써줄 수 있느니라. 너희가 정녕 죽어야만 하겠느냐? 하겠느냐? 내가 미간을 찌푸리지도 않고 이곳의 그 누구보다 크게 걱정하고 있음을 너희가 모르느냐? 잊었겠지! 너희가 기억하게 해줄 필요가 없다. 너희가 기억하므로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을 걸 필요도 없다. 너희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렇게.


:40 바로 이렇게

한 나는 모두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고, 신자는 울면서 바로 그렇게 방금 모두에게 말했다. 계원을 비롯해 모인 모두도 한 목소리로 신자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고, 모이지 않은 이들도 자신의 자리에서 그렇게 말했다. 카페에서. 또는 길거리에서. 자면서. 일어나면서. 물속에서. 동물들도, 시체들도, 나무는 물론이거니와, 벌레들, 별들, 모든 이름 붙은 것들이 처참한 심정으로, 여러 이름이 붙은 심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혜희도 어둠 속에서 바로 그렇게 속삭였으며, 한 나가 모두를 내려다보는 사이, 혜희는 말없이 빛나는 영전의 발을 쥔 채 한동안 이를 악물었다. 한동안 입을 벌리지 않고서.


:41 점퍼의 형사

둘은 유리판이 올려진 책상을 사이에 두고 섰다. 유리판은 둘의 형상을 희미하게 반사시키고 있으며, 유리판 아래에는 녹색 펠트가 깔려 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그냥 왔어. 왜 왔나? 묻는 점퍼의 형사에게 혜희는 편지를 내민다. 형사는 펴보지도 않고 신년부터 재수가 없다고 말한다. 신년 같은 것도 알고 제법이네. 말한 혜희는 형사에게 말할 시간을 주고, 형사는 말한다. 나도 그... 연명부에 있나? 없어. 형사는 웃자란 수염을 만지다가 편지를 책상 위에 던지고 점퍼 주머니에 손을 쑥 집어넣는다. 그럼 이건 왜 주는 건가? 누구한테 전하기라도 하란 말인가? 저 잘난 재건사령부가 박살이 난 줄을 이미 모두가 아는데? 그래? 우리를 재건사령부라고 불러? 그래. 그래? 자 그러면 이제부터 내가 물을게. 혜희가 묻는다. 우리가 잘났든 아니든 내가 하라면 너는 하면 되지 않을까? 언제부터 그렇게 질문이 많아졌어? 그리고 대체 왜 너 따위가 연명부에 있을 거라고 기대한 거야? 대체 누가 사령부로 한 나를 불렀다고 생각한 거야? 내가 이런 문제들을 정말로 다 너한테 알려줘야 할 것 같아? 네가 정말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 건 언제부터 한 생각이야? 왜 네가 모르는지 생각 안 해봤어? 바로 그래서 네 이름이 연명부에 없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형사의 생각은 어때? 혜희는 답할 시간을 주지 않고 형사의 볼을 꼬집어 준다. 형사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움직일 수가 없고 책상 위의 편지를 보고 있을 뿐이다. 혜희는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놓지 않은 채 묻는다. 담배 가진 거 있지? 형사는 주머니에서 구깃구깃한 담뱃갑을 꺼내 혜희에게 한 대 건넨다. 혜희는 갑째로 빼앗아 구겨 쥐고 형사의 뺨을 한 대 때려 준다. 정신 좀 차리시게 이 아저씨야. 형사가 눈을 내리깔고서 뭐라 우물거린다. 뭐라고요? 잘 안 들렸어요! 똑바로 다시 말하세요! ...개년. 밖이었으면 넌 죽었을 거야... 혜희는 웃으며 형사의 뺨을 한 대 더 때려 주고 책상 위에 연명부를 던진다. 혜희는 말한다. 바깥은 없고, 나는 불멸이야.


:42 점퍼의 서기보

점퍼의 형사가 강철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아 계원의 서한을 전사한다. 소파에 누운 혜희는 유리 재떨이 너머로 서의 형광등을 보고 있다. 역시 좀 억울하긴 하지? 뭐 말인가? 금연. 형사의 의자에는 쥐색 페인트칠이 되어 있다. 형사는 금연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혜희는 재떨이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리를 내며 재떨이는 바닥에 내려진다. 혜희는 손끝으로 재떨이를 앞뒤로 움직여 바닥을 긁는다. 내 생각은 이래, 형사. 들어봐 형사. 뭔가. 그러니까, 네가 왜 형사인지 모르겠다는 거야. 딱히 그렇게 불릴 이유가 없는데 말야. 여기서 형사 같은 게 무슨 필요야. 혜희는 손을 멈춘다. 형사는 일자로 입을 다물고 펜 끝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침착하십시오.' 이후, 펜을 떼기 전 획을 대각선으로 삐치는 계원의 습관이 슬픔에 흔들리기 시작할 때마다 형사의 이가 악물렸다. 어떻게 보면 죄를 저지르고 있는 건 차라리 이쪽이잖아? 어때 네 생각은? 혜희는 재떨이를 바닥에 대고 빙빙 돌린다. 내 생각에는, 나한테 말을 그만 걸었으면 좋겠는데. 그래? 내 생각엔, 형사보다는 서기보 어때? 점퍼의 서기보. 괜찮지 않아? 형사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왜 형사인지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지금까지 아주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럼 그걸로 하지. 혜희는 재떨이를 서기보 쪽으로 민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리를 내며 재떨이는 강철로 만들어진 쥐색 의자 다리에 부딪친다. 서기보는 펜을 내려놓고 혜희를 본다. 나도 뭣 좀 물어도 되나? 정중하게 말야. 뭔데? 그때 말이야, 기분이 어땠는지 궁금해. 그, 너희 쓰레기들아, 했을 때 말야. 너도 그때 말을 했을 거 아냐? 나도 말했거든. 물론 다들 말했겠지만. 특히 너는 기분이 어땠을지 궁금한데. 그래? 그런 게 궁금해? 너는 어땠는데? 쓰레기가 된 것 같았지. 그래? 내 기분은 어땠을 것 같아? 글쎄. 세계에서 최고로 쓰레기 같았나? 서기보, 이 한심한 서기보야, 대체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야? 어떤 기분이었느냐 하면, 나도 너희 쓰레기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은 기분이었단 말이야.


:43 팔짱

두 팔을 마주 끼어 손을 두 겨드랑이 밑으로 각각 두는 일. 맑은 날 오후 잔디밭에 잔뜩 모인 사람들과 아름다운 하늘빛과, 그 사람들은 가벼운 외출용 옷을 입고 있는데, 그들의 살과 옷 사이를 골고루 지나는 선선한 바람과, 어디서 나는지 모를 연기와 연기의 좋은 냄새와, 마이크와 앰프와 웃음소리와 모든 것들의 꿈을 꾸는 듯한 빛깔, 소리, 그런 것들과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약간 떨어진 것처럼 바라보며 가끔 어떤 표정을 짓는 것까지, 서로를 그 풍경의 일부로 보고 있는 것까지가 그 풍경을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잔디밭의 연단, 무대, 연주, 음료, 흥얼거림, 전기, 젊은 것이 주는 끔찍한 기분들까지를, 한 나는 나무 아래서 팔짱을 낀 채 지켜보고 있고 그 옆에는 팔짱을 낀 계원도 있다. 한 나와 달리 계원의 팔짱은 한 나의 전능과 처음 마주쳐 몸서리치고 있는 자신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감출 수 없다는 사실까지를 포함하여, 계원은 팔짱을 낀 채 눈앞의 잔디밭을 점점 흐리며 자신 속으로 무참히 빠져들고 있었다. 한 나는 그런 계원에게 간혹 상냥한 눈길을 던지고, 몇 마디 정중한 말을 건네는 것만 같다. 마치 손을 뻗는 것처럼도 보이고, 대체 왜 저런 것이 이곳에 있어야만 하는지 계원은 악몽을 꾸는 듯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 대체 왜 이곳에 필요한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새어나감은 팔의 교차로도 막을 수 없고 한 나가 소리 내어 웃는다. 우리... 이야기를 해 봅시다. 계원이 용기를 그러모아 말을 해 보지만 한 나는 말이 없고 소리 내어 웃을 뿐이다. 그 웃음소리를 듣자마자 계원은 왜 그런 것이 있는지 완전하게 이해했고, 동시에 예견된 두려움이 계원의 몸통을 발작적으로 옭아맸다. 아니, 말을 했다거나 한 나가 옆에 있었다거나 웃음소리가 들렸다거나 하는 일은 처음부터 착각이었고, 다만 팔짱을 낀 계원이 나무에 기댄 채로 깨어나며, 모든 것들 사이에 폭탄과 같은 빛과 경계가 돌아오는 듯하다가도, 밤은 순식간에 내려 만사가 차게 식는다.


:44 꿈속의 사단

편지를 든 사람, 편지를 든 사람, 자려고 누워 할 만한 즐거운 생각이 남질 않았다. 편지를 든 사람, 그런가. 아무 즐거운 것도 남지를 않았나. 혜희는 소파에 모로 누워 눈을 감고 생각한다. 불을 켤까. 불은 꺼져 있다. 물을 마실까. 편지를 든 사람, 혜희는 어둡게 앉아 물을 마신다. 혜희는 편지를 읽는다. 사령부에서 모두에게 전합니다. 먼저 슬픈 소식을 전합니다. 혜희는 글자를 만지며 모두가 그 슬픈 소식을 이미 알고 있을 것임을 안다. 여기까지 할까. 여기까지만 할까. 편지가 조금 젖었다. 물을 더 마시자. 편지를 접어 던진다. 불을 켠다. 불을 켜야 물을 더 마실 수 있다. 편지는 조금 안 좋게 접혔다. 혜희는 드디어 죽고 싶다고 형광등 아래서 생각한다. 내일 생각도 한다. 물을 더 마시고서 혜희는 다시 모로 눕는다. 불을 끈 다음이었다. 그게 이거야. 그게 이거였던 거야. 예전에 편지를 든 사람, 내가 했던 말이 바로 이 뜻이었던 거야. 정확하게 한번만 죽어 보고 싶었다. 편지를 든 사람, 혜희는 눈을 감고 외국의 사단 생각을 시작한다.


:45 슬픔신

슬픔신은 혜희의 머리맡에서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슬픈 표정이란 어떤 표정인가. 슬픔신은 말이 없었다. 말이 없다는 건 무슨 말인가. 슬픔신은 걷잡을 수 없이 좁아지는 자신의 시야를 어찌하지 못했으며 그것으로도 괜찮았다. 혜희의 흐트러진 머리칼에 집중해 보며 그래도 괜찮다는 것을 알았고, 점점 더 커지는 슬픔을 어디로도 흘리지 않고서 붙든 채 서 있었다. 얇고 날카로운 것이 슬픔신의 손에 들렸으며 그것은 무엇이라 무엇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슬픔신은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있었다. 혜희는 신이 나오지 않는 꿈을 꾸고 있었고, 슬픔신은 그것을 알았다. 슬픔신이 신과 같이 강력한 아귀힘으로 혜희의 연약한 장기를 쥐어짜 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목을 더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목구멍을 긁거나, 폐를 긁는 것이다. 하지만 슬픔신은 혜희를 지나쳐 간다. 아무것도 슬프지 않은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간다. 슬픔신은 슬픔을 느낀다. 느끼지 않을 것 같기도 하지만, 느끼고, 외친다. 잠든 이여!


:46 자살전도자

저것은 전도자의 대리석 요정 조각상 얼굴. 저것은 가늘지만 꼬리가 깊은 눈매. 저것은 홍채가 선명한 눈알, 적당히 감춰진 유리알 같은 눈알. 햇살, 배 속이 간지러워지는 모양의 콧등, 코끝, 인중.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은 인중, 하지만 저것은 동물의 입술과 턱. 구름, 번개와 천둥, 저것은 전도자의 바로 그 회칼 같은 머릿결. 깨어났을 때 바로 그 전도자가 혜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면, 이것은 전도자의 향긋하고 비릿한 숨결이 분명할 것이며, 인간이냐... 혜희는 꽉 잠긴 목으로 속삭인다. 언제까지 자는 거야? 내가 그대로 지옥에 왔는가? 혜희는 그렇게 말한 쪽이 누구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지옥처럼 말라붙은 입 속을 일단 헹구고 싶을 뿐인, 혜희는 자신이 물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소파에 볼을 댄 채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머리가 잘려 뒹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보세요? 전도자의 흥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꿈으로 연착륙하려는 혜희를 연이어 산산조각 내고 있으며, 한 나가 승리했는가? ...자연인가? 뭐라는 거야? 못 본 사이에 더 이상해졌구나, 이상해진 화자 대리님 제발, 위대하게 일어나 보세요, 세상이 끝나갑니다, 혜희는 퍼뜩 정신을 차린다. 꿈에 나와 자살을 권하는 친구들. 없는 친구들. 그러나 그중 한 명이 우연히 잠 바깥에 서 있으며, 그가 바로 그 전도자이다. 전도자의 뺨이 혜희의 귀 근처에 사실적으로 있었다. 혜희는 웃고, 너는 바로 그 전도자가 아니냐... 전도자도 웃었다.


:47 우리는 친구가 아닙니까

y는 바로 그 마지막 전도자의 이름입니다. 신자가 언제나 유일한 것과 같이 전도자들은 항상 마지막 전도자입니다. 전도자는 이곳에서 신의 얼굴을 봐야만 하는 몇 안되는 이들 중 하나이며, y는 여전히 신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방의 공중을 통과 중인 슬픔신의 뒷모습을 개의치 않고, y는 위대한 화자 대리에게 물을 건넵니다. y가 받으러 왔어, 하고 말하자 혜희는 물을 마신 다음 품에서 영전의 발을 꺼내는데, 영전의 발은 지금 혜희의 손 위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y는 물론 울음을 터뜨리지 않습니다. 영전의 발을 받아 손가방에 넣고, 혜희의 어깨를 한번 짚어줍니다. 우리는 친구지, 그렇지? 혜희는 y에게 들고 있던 편지를 줍니다. 아니지. 우리는 친구가 아니지. y는 편지를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y는 편지를 받습니다. 사령부에서 모두에게 알립니다. 그랬습니다. 우리는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48 조상 모양의 사자

도대체 누가 너한테 말해도 좋다고 했어? 조상은 혜희와 y 사이에 서 있고 죄라도 지은 듯 대답하지 않는다. 조상은 한 팔을 뻗고 있다. 조상은 앉아 있다. 조상은 울고 있다. 조상은 고개를 숙이고 있고, 다른 한 팔로 입을 가리고 있다. 조상은 한 팔을 등 뒤에 감춘 채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으며, 조상의 입은 벌어져 있다. 조상은 움직이지 않고, 조상은 활동사진에 깃든 영혼처럼 보인다. 조상이 있는 풍경은 유령 그림처럼 보이고 조상은 방금 막 전설적인 연극을 끝낸 것처럼 보인다. 조상은 단단하다. 조상에게는 관절이 없다. 조상에겐 표면뿐이다. 조상은 움직이지 않고, 조상의 자세만 시시각각 변화한다. 조상은 덩어리다. 조상에게는 팔도 없고 눈도 없고 입도 없다. 조상은 울거나 웃지 않고, 앉거나 서지도 않는다. 조상이 있다. 조상은 조상 아닌 것과의 입체경계면이다. 조상에게는 내부만 있다. 조상에게는 내부가 없다. 조상은 전해진다. 조상의 바깥이 전해져 내려온다.
사자는 조상에 그 모양으로 깃들어 있다. 사자는 자신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사자는 혜희로부터 귓속말을 받아 조상 모양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대체 혜희란 뭐야? 혜희는 신이다. 그리고 이것은 데모이니라... 하는 말을 사자가 이제 기억한다. 조상 모양으로.


:49 셋째 대담

엄청 바쁘네. 찾는 이가 많아서 좋겠어. 내가 지금 와서 본 것만 몇인지 알아? y는 말하며 혜희 옆에 앉는다. 혜희는 일어서며 말한다. 나한테 장난을 걸지 마. 예전이랑은 많이 다르고... 뭐가 다른데? 혜희는 웃는다. y는 묻는다. 뭐가 다른데? 엄청 바빠졌지. 왜 두 번이나 묻는 거야? y도 웃는다. 이러면 내가 아는 혜희가 아닌데. 혜희의 생각도 같았다. 젊은이, 그런 건 할 필요가 없는 말이라네... 혜희의 그런 생각을 y는 모른 채로 일어선다. 혜희는 책상 위에 컵을 놓는다. 혜희에게 y가 묻는다. 그래서 혜희란 건 뭐야? 이게 다 뭐야? y는 일어선다. 왜 두 번이나 일어서는 거야? 혜희는 사자의 손끝을 만지며 말을 잇는다. 너는, 너는 조금 더 여유를 가지도록 해. 너는 훌륭해. 하지만 성급하고. 조언? 그거 조언이야? y는 컵을 쥐며 빠르게 되묻는다. 아냐. 혜희는 y를 노려보고 있다. 그런 식으로 날 본 적은 없었잖아? y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눈치다. 거기선 바로 그 말을 해야 하네 젊은이... 어째서 위축되는가? 조상 모양의 사자가 이제 y를 보고 있다. y는 그곳에 모인 것들의 위치가 혼란되는 것을 느낀다. 만물이 이렇게 분명한데도 말이다. 항상 이런 식이지. y는 옛날 생각이 난다. 저건 조상이야 사자야? 사자. y는 사자를 바라보고 있다. 조상 모양이지만. 조상이란 얘기야? 사자. 이렇게 간단한 거야. 이렇게 말이지. 혜희는 너무나 오랜만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고 y에게 말한다. 그렇다면 화자 대리의 삶이 어떤 것인지 나한테 한번 얘기해 보는 건 어때? 친구니까 말이야. 혜희란 건 뭐야? 혜희는 사자의 손을 잡는다. 그리 의미심장하지는 않게. 우리가 여기서 끝낸다면 우리는 예전과 같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지.


:50 화자 대리의 삶이 어떤 것인지 말해 버리기

약간 이르게 발과 이를 닦고 불 끄고 이불 덮고 누워 재건을 하고 있으면 저는 대단한 안정감을 느낍니다. 왜 저게 말하는 거야? 그런 게 화자 대리의 삶이야.
나는 매일매일 너희를 쓸어 내 버리고 싶지. 하지만 너희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런 건 내가 하는 일과 아무 상관이 없어. 그래서 나는 내 일을 매우 좋아한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고 말고는 내 일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 게 화자 대리의 삶이고.
아무도 나를 어떻게 하지 못하며, 아무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그것은 내가 아니다, 이런 말을 보더라도 슬프거나 우습거나 도대체 어떻지가 않아. 사랑했던 사람들은 너무 간단하게 있고, 엎어져 있거나 누워 있고, 떼로 묻힌 채로 있어. 대체 어떤 원수가 그렇게 했을까. 나는 좋은 냄새가 나는 나무 뿌리를 침착하게 잡은 벌레이고, 그것이 화자 대리의 삶이야.
우여곡절...
화자 대리의 삶, 왜 그런 것이 있을까? 화자 대리는 찾아 헤매고 있어. 신이 되면 뭘 할 거니? 누가 그걸 물었고 혜희는 그걸 너무 오래 생각했어. 그러다 찾아 헤매게 되었고, 그 다음부터는 정지된 삶, 화자 대리의 삶이었던 거야. 누구라도 어느 정도는 이런 식으로 살 거라고 생각해. 네가 심상하게 혼잣말로 물은 것을 누군가 영원히 기억해 버릴 위험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니? 나는 있단다. 너도 있겠지. 나 같은 건 없어도 돼. 그런데 있는 거야. 있고, 죽어서도 기억하는 거지. 누워서. 흙 속에서, 흙이 되었다가 흙이 아닌 것이 되고 나서도. 어쩌면 만사가.
너무나 많은 것들이 내게 오고 있다.
너도 그것들 중 하나고.
너희는 내가 말해주길 말없이 기다리고 있어. 너희가 할 말을 내가 말해 주기를. 단지 내가 화자 대리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화자 대리의 삶이야.
울 수 있을 때 울거라. 우는 건 좋은 거야.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지. 우는 얘기. 네가 설령 매일 일처럼 울고 있더라도 그렇다. 그리고 화자 대리는 누구를 대리한다는 걸까, 화자가 아니면 누구겠어? 이런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지만 말해야 할 때가 가끔 있어. 네가 거울 속 너의 부은 눈을 보며 약간의 만족감을 느끼더라도 말이야. 유령을 노려보기. 그런 게 화자 대리의 삶이야. 화자는 있다. 하지만 생각처럼은 없어서, 이렇게 있는 거야.
그래서 혜희란 뭐야? 혜희는 신이야. 그리고 데모. 혜희를 우리라고 부르면 어떨까. 우리는 행진이야. 시연이고, 위력의 행사야. 우리는 우리야. 혜희는 신이고. 말을 할 줄 모르는 신이었지. 이제는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할 수 있게 되었을까. 재건 속에서. 저 싱그러운 잎사귀들이 보이니?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가 않단다. 저마다 찢어서 나눠 가졌던 신을 손에서 손으로, 한쪽으로 계속 전하는 거야. 그것이 재건이고, 혜희는 수초를 붙든 물방개야.
널 더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겠니?


:51 재앙 재생과 정신 파탄

계원은 풀밭에 앉아 한 나와의 만남을 처음부터 끝까지 돌이켜 본다. 풀밭에 앉은 계원이 한 나와의 만남을...


:52 재판장 풍경

의자, 천막, 아침. 흰 김을 뿜는 사람들. 앞표지와 뒤표지의 색이 다른 팜플렛. 많은 의자, 많은 팜플렛. 두 명의 숫자 세는 사람. 그들의 손에도 들린 팜플렛과 술병. 의자에 앉은 많은 사람들. 그들의 손에도 들린 팜플렛. 손으로 만든 어설픈 배지를 단 몇 명의 위원장과 그들 손의 팜플렛. 붉은색과 검은색, 펼칠 필요가 없는 낡은 팜플렛. 나무 의자들이 놓인 재판장. 붉은색과 검은색. 곧장 거꾸로 매달리는 인민의 수치들. 며칠 만에 내려지는 수치들. 내려진 이들의 입술을 미지근한 물로 적셔 주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 손에 들린 붉거나 검은 팜플렛. 드럼통을 잘라 만든 난로에 언 손을 쬐는 사람들. 그들의 손에 들린 팜플렛. 빈 의자가 없는 재판장. 낡은 장갑을 줍는 사람. 선 사람.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천막 안쪽으로 실려가는 사람. 장갑을 터는 사람. 당신은 수치를 씻었소! 소리 치는 사람. 멀찍이 서서 담배를 나눠 피우는 연인. 그들 모두의 손마다 팜플렛. 드디어 모포에 쌓인 채, 천막의 훈기 속에 누워 눈을 감은 채, 의미 모를 숨을 내쉬는 사람과, 그 품에 팜플렛을 넣어주는 사람.


:53 야경꾼
야경꾼이 그 나무 아래를 지난다. 지나며 거꾸로 매달린 계원을 본다. 야경꾼은 나무 아래 팻말에 적힌 것을 읽어 보려고 한다. 계원의 눈물이 계원의 머리칼 속으로 차갑게 흘러내리고 있다. 그것은 아무도 볼 수 없다.


:54 성현
문이 열리고 찬바람과 함께 들어온 이는 성현이다. 전도자의 침통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기계장치처럼 돌아 성현에게 향한다. 성현은 주홍색 빛 속에 아주 잠시 서 있다가 모두의 눈을 피하며 구석에 앉는다. 현관의 센서등이 꺼진다. 모인 대부분이 그 모습을 보고 함께 떠올린 것은 쥐다. 성현은 죄를 지은 사람처럼 움츠려 앉아 있고, 멘 가방을 내리지 않고 있다. 성현은 고개를 숙인 채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게 우물거린다. 많이들 왔네요. 그리고 성현의 다음 말을 모두가 기다리고 있다. 다음 말은 뭐야? 약간의 사이 후에 혜희가 묻자 성현은 여전히 짓궂으시다 말하고 줄 것이나 주시라고 말한다. 혜희가 편지를 꺼내러 간 사이에는 모두가 성현의 손을 본다. 길고 가늘긴 하지만 아릅답진 않은 손. 그로부터 심원한 비밀을 깨달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성현 역시 자신의 손을 보고 있다.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성현이었는데도 모두가 성현을 기다린다. 혜희는 돌아와 그런 모습을 보고, 성현의 손을 잡으며 잘 와주었다고 말한다. 성현의 쓴웃음을 모두가 본다. 편지가 성현의 손 위에서 아름답게 펼쳐져 곧장 읽히는 것도. 성현은 잘 들리지 않는 크기의 목소리로 말한다. 여러분은 계원의 일을 들으셨는지...


:55 여기에 모여 우리는

더 누가 올 것 같진 않아. 이제 찾아올 이는 다 찾아왔고, 나머지는 내가 직접 찾으러 가야 해. 계원의 소식은 다들 들은 대로야. 너희는 성현과 함께 먼저 가. 너무 슬퍼하지 말고. 필요한 게 있으면 서기보에게 말해. 이제 의견이 갈리면 성현의 말을 들어. 그렇게 하겠지만. 너무 들뜨지도 말고. 침착하게 가도록 해. 아마 눈에 몹시 띌 거야. 이곳을 거의 가로지르게 될 테니까. 기왕이면 너희가 간다는 걸 모두에게 보여주도록 해. 밤에는 자는 거야. 밤에 가야만 한다면 불을 들고 가면 좋겠어. 가면서 딱히 무슨 말을 할 필요는 없지만 말을 하고 싶다면 말을 해도 좋아. 이제는 너희가 가는 거야. 너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도록 해. 너희가 아니어도 된다는 생각도. 가는 길을 성현에게 알려줘. 성현을 꼭 지키도록 하고. 혹시 성현이 결정을 못한다면 전도자를 따르고, 성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대로 해산해. 준비가 되는 대로 가도록 해. 나는 더 자야만 하고...


:56 리버 2

드디어 이동준비를 마친 사단의, 영원한 신병들. 그들의 영문 모르는 얼굴에 떠오르는 끝없는 억울함을 본다. 조율을 시작하는 나팔수의 단단한 손끝, 베테랑 기수들의 굳어가는 입가, 낡아빠진 마차와 교활한 말들을 본다. 어깨에 걸친 휘장을 매만지는 고수. 역시 낡은 마차들, 잡동사니로 가득한 마차들. 다시 말들을 본다. 소들을 본다. 소들은 어디에 있었나. 소들은 외양간의 걸쇠를 천천히 들어올리며 나왔다. 조상 모양의 사자가 실리는 선두 트럭, 그에 맞춰 장난스런 가락을 부는 나팔수. 고무바로 고정되는 조상. 조상 여기저기에 묻는 매연 검댕. 그곳의 무엇보다도 거대한 주기를 온몸으로 지탱 중인 선임기수를 본다. 선임기수는 어디 있었나. 선임기수는 곧장 울기 시작할 것 같다. 슬픔신이 모든 이들 사이로 다니며 이 일들이 다 어떤 일인지 알게 해주는 것을 본다. 몇몇이 쓰러졌다가 일어나고, 그것이 마지막 전례다. 천막 수레에 오르는 성현과 얼굴을 가린 전도자를 본다. 악기를 든 이들 대부분이 웃고 있는 것을 본다. 출발, 출발을 외치는 고함수들을 본다. 우스꽝스런 모자를 쓴 고함수들이 뒤로, 뒤로 고함을 전달하는 것이다. 맨 뒤에 있는 것은 사가의 관이고, 들어올려진 커튼이 떨어지며, 혜희에게는 남은 할 일이 많다.


:57 사가의 관 속

사가의 관 속에 있는 것은 사가의 몸. 사가를 가리켜 잠들었다고 하지 않는 이유는 사가가 깨어나지 않기 때문. 사가가 꾸는 꿈이 없는 것은 사가에게 입이 없기 때문. 사가의 관 속에는 계원의 나신을 본뜬 석고상이 들어 있고 그것을 이제는 사가의 몸이라고 다들 부르는 것이다. 사가의 진짜 몸이 어딘가에 있다는 소문이 먼저 돌고, 그러한 미신들을 처리하는 것이 사령부의 첫째 일이었다. 무차별로 쏟아져 흩어진 이름들이 아무것도 감히 지휘하지 못하도록, 그것들을 성좌로 만드는 것이. 혜희는 계원의 나신 사진을 찢어 물 위에 던진다. 다시 한번 창밖을 보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혜희는 그 문장을 연이어 되돌려보며 눈을 감는다.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계원에게 몇 자 적어 보낼까 하다가 그만둔다. 혜희는 눈을 감고, 사가의 관 속에 있는 것은 사가, 혜희는 사가가 이제 관 속에서 속삭이게 한다. 사가의 관 속에 있는 것은 사가... 사가는 관 속에서 속삭이고 있고 재건위원회 행렬은 햇빛이 쏟아지는 대로를 지나고 있다.


:58 담배의 요정을 추억함 (상)

담배의 요정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추억 속에서 지금 헤매고 있다. 나가는 길을 찾지 못하는 요정의 안타까운 얼굴. 담배의 요정의 언제나 자신만만했던 포즈를 약간 슬픈 감정과 함께 혜희는 떠올린다. 담배의 요정은 언제나 품속에 신들의 하반신을 가지고 다니는 멋쟁이였지. 요정은 언제나 거래를 사랑했고, 요정은 언제나 권했다. 요정은 불의 논리를 알고 있었고, 요정은 우아하게 가르쳐 주었다. 요정을 위해 몇 개의 문장을 더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정아!


:59 담배의 요정을 추억함 (중)

죽을까. 이쯤에서 죽어 버릴까. 더 있을 필요가 없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혜희는 바로 방금까지 그렇게 생각했던 자신의 머릿속을 지금은 헤아리고 있다. 이왕 죽는다면 죽기 전에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싶다. 그런 생각도 분명하게 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옳게 되는 것이 아니야? 혜희는 시간을 확인한다. 아직 오전이었다. 선후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니. 이 지경에. 혜희는 알고 있었다. 혜희가 목을 맨다면 혜희는 목을 맨 혜희가 될 것이고 뛰어내린다면 뛰어내리는 혜희가 될 것이고 머리를 자른다면 혜희의 머리와 혜희의 아직 죽지 않은 몸으로 나뉠 것이다. 혜희는 시간을 확인한다.


:60 하나에 정신을

정신이 좀 드시오? 이렇게 될 줄을 대체 어찌 알았겠소. 사뭇 걱정스러운 듯한 목소리와 달리 신사의 얼굴은 평온했다. 계원에게 그러나 거기까지는 눈이 닿지 않았다. 계원은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끔찍한 냄새가 나고 있는 듯한 입을 다물고, 계원은 마지막부터 떠올려 보려고 했다. 당연히 알았겠지. 그건 미친 결정이었소. 이렇게 되는 게 당연하지. 신사는 등받이에 기대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밖에서 별다른 일은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계원은 물컵 속의 물에 반사된 햇빛이 천장에 어른거리는 모양을 바라보았다. 떠오를 리 없는 것을 떠올리려고 하시오? 신사는 몸을 일으키려는 계원의 베개를 세워줬다. 혜희가 죽었다는 소문이 있소. 담배를 한 대 피우고서 자살했다는 얘기지. 어떻소? 계원은 말없이 신사가 건넨 쪽지를 앞뒤로 읽어보고 돌려줬다. 신사는 재떨이를 가져와 성냥을 그었다. 계원은 불타는 쪽지를 보며 물을 마셨다. 만약에, 하고 계원은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61 담배의 요정을 추억함 (하)

잠이 쏟아지는구나...


:62 이것은 하나의 악몽이 아니고

어떻게든 버텨왔지만 얼마나 더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생활이 이곳과 우리를 갈아 버리고 있다. 우리가 말하든 말하지 않든. 몇 개의 어떤 소리를 내든.
이것은 하나의 악몽이 아니고 우리는 다시 뜨는 해를 본다. 우리는 여름 감기에 걸려 있고 우리는 이제 중단하고 싶다. 만사를. 만사라는 생각을.
그냥 계속하는 거지. 그냥 계속 한다라... 그냥 계속한다. 계속 한다.
거리로 다닐 때 우리의 꿈이 우리의 거리에 난입한다. 골목으로 다닐 때. 이것은 하나의 악몽이 아니고 여러 악몽, 대로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의 총합,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의 총합 같은 것이다.
만약에 혜희가 죽는다면, 만약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 혜희가 죽었고 여기에 있다면. 이곳이 사후세계라면, 우리만이 그것을 모르고 있다면. 천사들이 천사들이고 개들이 개들이라면. 이곳이 어디인지 모두가 안다면.
이곳이 하나의 악몽이 아니고 이곳이 이곳일 뿐이면, 바깥은 없고, 안쪽도 없으며, 바깥은 이곳이고. 저곳은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악몽이 아니고 여러 악몽이라면, 우리가 여럿인 것은 결국 분명해진다. 우리는 이제 우리라는 생각과 우리를 중단하고 싶어진다. 어떻게든 버텨왔지만.
생활이 우리를 갈아 버리고 있다. 가루로, 재로. 비열하고 무자비한 하느님 같은 생활. 우리는 악몽 같은 소리를 내며 흩어지고 있다. 당연하게. 당연하게 우리는 유리를 떠올린다.
만약에 혜희가 죽는다면. 그러나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63 불의 논리

드디어 불의 논리다.


:64 불의 논리 - 두뇌 교정

불의 논리는 상반신과 하반신이 멀쩡한 채로 마을에 당도했다. 피 묻은 자루를 여전히 갖고 있고 자루 속에 여전히 몇 개의 고구마가 들어 있다. 불의 논리와 관련된 여러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마을을 정적 가운데 빠뜨리고 있다. 불의 논리는 항상 도착한다. 불의 논리가 온다는 소문은 항상 불의 논리보다 먼저 오고, 그 다음에는 숨죽인 이들이 창구멍을 통해 항상 불의 논리를 본다. 아이들은 특히 타오르는 듯한 눈과 뺨으로 본다. 항상 그런 아이들이 있다. 불의 논리는 소년소녀들의 미소를 좋아하고, 아버지들의 머리통을 부숴 놓는다.


:65 불의 논리 - 자세 교정

바깥은 피를 태우는 교정 축제. 흔들리는 그림자가 창을 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혜희는 독을 먹은 것처럼 잠들어 있기 때문에. 총을 얻는 꿈을 꾸고 있기 때문에. 한창 죽이고 있기 때문에. 편하게 눕히고 있기 때문에. 뼈를 태우는 축제, 살을 태우는 축제. 다시 늘어놓을 수 없을 것들을 공중에 늘어놓는 중이다. 우리는 전부 낡아 빠지겠지. 비뚤어진 채로 굳어 가는 것이다. 우리는 벗겨지고 쓰러진다. 불똥들이 밤하늘로 끌어 올려지는 것처럼 보이고 그것들은 우리의 이마와 정수리에 재로 앉아 있다. 아주 편안하게. 혜희는 엎드린 불의 논리의 몸체를 뒤집어 준다. 두 눈구멍이 비어 있는 것을 본다. 네가 나오면 너무 많은 것이 너무 쉬워진다. 우리를 이끄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도. 불의 논리는 이제 이곳이 어디냐고 묻는다.


:66 불의 논리 - 계속 교정

사법기관, 경찰력, 영혼의 문제. 우리는 조약돌을 쥐고 있고, 그 조약돌은 손안의 조약돌보다 좋은 것이었다. 옳은 것이었고. 살갗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형상에 깃든 영혼을 쥐고 있으며, 작은 신전이 우리의 팔 끝에 달려 있다. 사법기관, 경찰력, 영혼 문제가 설교되고 있다. 사제는 희고 작은 사제. 손을 펴면서는 무법지대의 예언자였다. 혜희는 묻는다. 그것은 어디에서 났지? 불의 논리는 기억해낼 수가 없고 이곳이 어디냐고 묻는다. 혜희는 묻는다. 그것은 어디에서 났지? 왜 그것을 저에게 묻느냐고 답하고 불의 논리는 몸의 끝부터 공중으로 잘려나가는 듯이 느낀다. 해석력, 부서지는 문제. 맨손으로는 부서지지 않는 문제. 막대한 졸음이 만사를 덮친다. 물을 향해 가는 것인지 물이 자신을 향해 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불의 논리는 바로 누운 자세로 귀를 기울인다. 그것은 어디에서 났지? 그것은 법전의 계속 교정이었다.


:67 시작하는 일

모욕 가운데 우리는 행진하고 있습니다. 빛은 왜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거의 끝났습니다. 이렇게나 모여 있고 아무 이룬 것도 없는데요. 나약한 소리라고 하실 테지만, 어쩌면 그런 소리마저 없으실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지금 너무나 힘듭니다. 우리는 정말로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죄는 있고 잘못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닙니다. 가혹합니다. 이런 일을 정말로 끝없이 당할 수는 없습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너무나 두렵습니다. 이기기는커녕... 우리는 용서될 수나 있습니까? 우리의 가슴이 죄이는 듯합니다. 우리에게도 잘못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아닙니다! 우리는 이 모욕을 점점 더 당연히 여기고 있습니다. 아뇨, 이럴 수는 없습니다. 당연한 것은 없다, 우리가 지금 입밖에 내는 말은 계속 그런 것입니다. 당연한 것은 없다. 우리는 긍지를 거의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한 나를 만났던 일을 점점 더 자주 떠올리고 있습니다. 이렇게나 모인 채로요. 마지막 순간이 왔을 때, 우리는 울며 용서를 비는 것 정도로 끝내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지금 우리이고 싶지가 않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가혹합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나도 참을 수 있어요. 우리에게도 죄는 있고, 우리도 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닙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어디에도 없는 사령부를 향해 가야 합니까? 우리의 두 번째 회의는 언제 시작됩니까? 우리는 이제 그조차도 묻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점차 서로에게 가까워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우리는... 절대 울며 용서를 비는 정도로는 끝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디 몇 마디만 해주십시오. 이 글이 우리의 것임을 이 메모가 증명합니다.


:68 이곳에 대해 말해 버리기

이곳은 살갗 너머다. 인간의 안쪽이다. 인간으로부터 인간의 초과분을 밖으로 덜어낸 곳이다. 이곳은 얼룩이다. 빛이다.
이곳에 대해 말해 버리기. 이곳은 인간의 바깥이다. 영혼이 본래 무엇에 대한 비유로 고안된 것인지 알아보는 곳이다. 이곳은 얼룩이다. 빛이다.
이곳에 대해 말해 버리기. 바깥은 없고 화자 대리는 불멸이다. 불멸... 기묘한 상상. 신에게도 취미가 있고 그로부터 배웠다. 그늘이 있다. 격자무늬. 창문. 만물.
너희라는 생각은 이쪽에 있다. 자연스럽게. 이곳은 살갗 너머에 있다. 이곳에 대해 말해 버리기. 리듬을 위해서. 리듬을 망치기 위해서. 이곳은 너희 전부를 밀어낸 곳이다. 이곳은
이곳은 눈길이 닿는 데까지 없고 눈을 제하면 없다. 잠든 이의 머리에 손을 얹은 이가 이곳을 가장 투명하게 보고 있는데, 이곳은 손을 맞잡은 비유들이 서로를 보는 곳, 손을 놓는 곳, 서로의 얼굴을 헤집는 곳이다.
이곳에 대해 말해 버리기. 너희라는 생각이 이곳을 사로잡고 있다. 생활이 아닌 부분이 이곳을 이루고 있다. 귀가 닫히는 시간에 이곳은 있다. 꿈 같은 마법사의 옷을 이곳으로 끌고 나오며, 끌려 나온 너희가 알몸으로 다 죽인다.


:69 이곳은 우리는 유리의 연계로

행렬은 ㄱ대로에서 멈췄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어요. 길 가운데서 느슨한 열을 지은 채 서 있습니다. 모두가 조상처럼 굳었습니다. 근처에 가면 무수히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길은 폐쇄될 겁니다. 당신은 아직 움직일 수 있습니까? 맞아요. 우리는 졌습니다. 신사는 말합니다. 우리는 졌습니다. 혜희는 여기에 없습니다. 어제 꿈에 나와서 내게 말했지요. 계원에게는 내가 산산조각이 났다고 전해다오. 계원은 도통 잠들지를 않는구나. 당신은 잠을 자는 편이 좋겠습니다. 눈을 좀 감고... 어째서 그러고 있습니까? 어쩌면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저일까요? 당신은 이미 예전에 누구보다 먼저 쓰러졌고 나는 무용히 당신을 돌보고 있었던 것일까요? 잠들지 않는 계원이여, 어째서 내가 말하고 있습니까? 조상 모양의 사자 말투로, 신자와 같은 말투로, 당신의 말투로, 나는 무엇을 채우려는 걸까요? 아니면 대신합니까? 이 일은 두려운 느낌을 줍니다. 당신이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보고 있습니까? 그리고 혜희의 말은 어째서


:70 어째서 아직도 이곳에

어째서 아직도 이곳에 울리고 있습니까


:71 지나는 길마다

지나는 길마다, 이제는 어떻게 합니까 물어 온다. 혜희는 이제 어떻게 할까 생각한다. 혜희는 대답하지 않는다. 당신은 죽었다고 들었는데! 내가 불멸이라고는 못 들었나보네. 혜희는 대답하지 않는다. 혜희는 골목으로 들어선다. 영전이 태어난 골목이었다. 혜희는 검은 대문을 민다. 아직도 이런 대문이 있는가. 영전의 장성한 아들딸들이 꼬리를 흔들며 혜희를 맞는다. 혜희는 대답하지 않는다. 이제 어떻게 할까. 개들은 세멘 바닥에 등을 비비고 있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혜희는 뭐라고 속삭여준다. 계단 위의 문이 열리며, 개 주인이 나와 오랜만이야, 하는데, 목소리를 듣자마자 여러 옛일들이 떠오르고, 그것은 전부 일어나지 않은 일들인 것만 같다. 혜희는 대답하지 않고 개 주인에게 편지를 주며, 개 주인은 편지를 받는다. 죽었다고 들었는데. 언제? 혜희는 대답하지 않는다.


:72 채형주

그렇게 있으니 꼭 유령 같네. 들어오도록 해. 내가 뜨거운 차를 줄게. 말하는 형주는 이제 마치 사람처럼 보인다. 형주의 손짓은 이제 온화하다. 형주의 목소리는 이제 또렷하고, 이제 부드럽다. 형주의 머리는 차분하며, 더는 그 속에서 꺼진 듯한 눈으로 혜희 뒤쪽의 허공을 보지도 않는다. 형주의 분명한 얼굴의 방향과 또렷한 눈동자가 혜희의 시선을 너무나 익숙한 움직임으로 붙잡는다. 혜희는 새삼스러운 놀라움을 느낀다. 인간은 죽지 않고도 세상에서 이렇게 영영 사라질 수 있다. 통속적이군. 혜희는 자신도 이제 그렇게 보일 것임을 안다. 아냐. 너는 변한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해. 형주는 접시에 비스킷을 몇 개 올려 가져온다. 대체로 그대로야. 거의 안 변했어. 형주의 턱은 더 이상 기묘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형주는 입을 분명하고 바르게 움직여 말한다. 몇 년 전에 네 소식을 들었어. 차라리 편해졌지. 나는 포기를 더 미룰 수 없었어. 많이 변했지. 하지만 어쩌면, 어쩌면 지금까지, 라는 생각이 아직도 가끔 든다. 그러나 너를 봐도 거의 아무렇지 않은 걸 보면, 나도 많이 변한 거야. 많이 변했지. 네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다 주절거리고. 이것도 통속적이지? 형주는 소파에 한껏 몸을 묻는다. 영전의 자식들 중 하나가 올라와 형주의 무릎에 머리를 올린다. 맞아. 내게는 이제 소파도 있어. 영전은 없지만. 차는 썼고 과자는 달았다. 형주는 이제 배 위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고 있다. 저들끼리 장난치던 개들도 그 주위로 모여든다. 차가 식고 있다. 개들도 눈을 감고, 혜희는 입을 연다. 들어라 너 개 주인아.


:73 직사광선

계원 모양의 조상이 지금 창밖을 바라보는 듯이 침대 위에 놓여 있다. 계원의 겉보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겉보기로는 조상의 재료를 가늠할 수 없다. 조상의 하반신을 덮은 홑이불 위에는 마름모꼴의 햇빛이 천사의 전언인 듯이 떨어져 있다. 모든 것이 정지한 것처럼 보이며, 이불 안쪽의 온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조상의 계원 모양 저편에는 조상의 재료가 가득하다... 말장난은 이제 그만두시오! 공중으로부터 내려온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직사광선을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창가에 놓인 화분 안의 관엽식물이다. 없는 것은 어디서부터 없는가, 공중? 태양? 조상? 이제 그만두시오...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창가에 놓인 화분 안의 관엽식물이다. 계원은 지금 그것을 바라보는 듯이 침대에 있고, 침대 위에 떨어진 직사광선은 어제와 같은 각도로 점점 일어나고 있다.


:74 넷째 대담

개주인은 혜희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다. 너는 지금 엎드려 만사가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는데, 개주인아, 내가 속삭이면 개들도 너를 떠난다는 것을 몰랐느냐, 너를 탓해야만 움직이겠느냐, 내가 이곳에서 죽지 않는 줄을 모르느냐, 너와 내가 이전과 다른 줄을 몰랐느냐. 혜희는 기다린다. 몰랐나이다... 개주인은 바닥을 적시면서 우물거린다. 무능한 자야, 너 개주인아. 왜 나를 슬프게 하느냐? 어깨를 들썩이지 말라. 코를 훌쩍이지 말라. 한 나를 대하듯이 나를 대하지 말라. 어째서 그렇게 긍지가 없느냐. 이 명단에 네가 있는 줄을 몰랐느냐. 혜희는 기다린다. 알았나이다... 어째서 오지 않았느냐. 기다린다. 개주인은 엎드려 있을 뿐이다. 개들이 그 옆으로 다가와 각자의 앞발 사이에 코를 묻는다. 혜희가 속삭이자 개들은 천천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데, 개들을 내보낸 혜희가 개주인을 일으켜 세우고 어깨에 손을 얹어 주며 말하기를, 우리는 친구가 아니고, 용서도 없다.


:75 연명부

옛 적
사령부 터 언덕
재건위원회 인사계원 주란 - 완전 빠져 가지고...
재건위원회 화자 대리 하혜희, 위대한 화자 대리인 저가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명령서(보증서로 씀)
사령부 전시 복도
담배의 요정 액자
사자 배낭의 알려지지 않을 전 주인
종자들
튼튼 두툼한 편지봉투(반분선문서, 강령, 계원서한, 1·2·3·4차 대담)
신사: 수염과 뜨내기들의 수호자 영수
생전의 영전(대영웅)
한 나: 그림자 엔진 - 이번에는 꼭 죽이자 화이팅!
영전(발)
성난 이들의 연기 축제
신자, 이 친구 어떻게 됐지?
(신자의 것이었고 화자 대리가 친히 사용했던) 녹색 술병
붙이지 못한 포고문
담길 데 없는 은단 클러스터(구 담배의 요정)
캐비닛(개박살)
물속의 것~동물~시체~나무~벌레~별~그 외 이름 붙은 것들 네트워크
점퍼의 전직 형사 서기보: 불멸의 개년의 충성스런 개 재열
꿈속(외국) 사단의 영원한 신병들
(꿈속의 사단의) 소와 말 마차
(꿈속의 사단의) 기수단
(꿈속의 사단의) 나팔수와 고수들
(꿈속의 사단의) 사랑하는 고함수들
슬픔신(슬픔)
y라고도 하는 자살전도자 재영 - 얘랑 친구 아님
화자 대리의 원격 앰프, 조상 모양의 사자 - 중앙 트럭?
겨울 재판위원회(적흑 팜플렛 나중에 꼭 구할 것!)
형벌목 70보 담당 야경꾼
성현 성연 - 주렴 가마였나 천막 수레였나...
관 속의 사가
미령, 불의 논리
타오르는 마을 사람들
ㄱ대로 바리케이드
영전의 장성한 자식들
유리로 만들어진 관, 개주인 채형주 - 질질 짜기나 하고
관엽식물


:76 사가

이제 화자 대리가 정지된 이들의 바다로 들어간다. 속삭이는 소리가 파도치는 곳. 도중 천막 수레에 들러 주렴을 걷으면, 서로에게 기대어 잠든 성현과 전도자가 있다. ...그리 아니하신다면... 뭘 아니하고 있니? 그들을 위해 화자 대리는 영전의 맏딸을 남겨 두고, 대신 전도자의 손가방에서 영전의 발을 꺼낸다. 그 딸에게 어머니의 이름을 속삭여 알려 주고, 그 어머니의 발을 흔들어 작별한다. 너는 첨병의 시조니라... 첨병의 시조는 성현의 무릎 위에서 코를 핥으며, 주렴의 흔들림이 멎을 때까지 화자 대리를 본다. ...하겠나이다... 뭘 하려고 하니? 화자 대리는 준비된 자리를 향해 가며, 이제 약간 춥다고 느낀다. 해는 곧 뜨겠지만, 해는 곧 뜨겠지만. 화자 대리가 품에서 불의 논리를 꺼내어 그 환한 귀에 대고, 먼저 가 내가 돌아간다 전해다오, 하자 옳게 알아들은 불의 논리가 이제 물구나무로 출발한다. 이제, 그리고 이제, 주변은 온통 새파랗다. 더 그럴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형주의 얼굴도 그렇다. 나는 더 할 말이 없어... 이 어리석은 자야, 더 멋진 말을 해야지. 그렇게 말하면 끝인 줄 알면서 그러느냐? 형주는 화자 대리의 손을 잡았다가, 개들에게 그 손을 핥게 해 준 뒤, 주저앉는다.
이제 화자 대리는 글자처럼 관 속에 눕는다. 밖에서 형주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그만 좀 울어라. 질질 짜기나 하고... 화자 대리는 깜빡이는 별들을 보고 웃는다. 나에게도 주렴이 있었으면. 그리고 약간의 요의를 느끼며 주머니 속에 손을 넣는다. 그곳에는 빛나는 영전의 발이 있다. 화자 대리는 이제 말한다. 사가여, 너는 시간을 돌이키지 못하고, 무엇도 돌이키지 못한다... 관에 누운 사가가 관으로 들어가며, 우린 실패했습니다, 적고, 나는 실패했습니다, 적는다. 화자 대리는 시간이 사가 위로 겹쳐 쌓이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며, 이윽고 관을 들어올리는 것은 시간의 무게인데, 사가여, 너는 시간을 돌이키지 못하고, 사가, 사가여, 사가 위로 쌓이는 것은 화자 대리, 적히기를, 불멸은 없고, 바깥은 온다. 화자 대리는 웃고, 사가는 운다. 슬픔신이 이제 눈을 뜨는 시간. 행렬도 끝없는 속삭임으로부터 깨어나, 각자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한다. 이제 그 소리는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게 되며, 그 음성은 이곳에 울리고 있다. 이제 행진이 천둥 전의 번개처럼 시작된다. 화자 대리의 손에는 쪽지가 들려 있고 쪽지에는 개미 떼 같은 글자가 가득하다. 사가여, 관 속의 행렬이 관을 데리고 관 밖으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리고 없어질 것이다. 이제 그리 될 것이다. 우리는 돌이키지 못할 것을 남긴다. 사가는 관 속에서 이제 자신을 찾으며, 대단한 갈증을 느낀다. 대단한 갈증을.


:77 비상연락망

혜희가 배지를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가, 힘껏 내던지며 한 번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되는 것이다! 내가 너의 품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너는 그의 품으로 뛰어들고, 그는 나의 품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튕겨져 나와 서로를 향해 뛰어들고, 우리를 거쳐 자신에게 돌아간다. 우리는 우리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른다. 우리는 아무 준비도 없이 손을 놓치고, 그 다음에 놀란 채로 손을 흔든다. 그런 정도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어안이 벙벙해진 채 돌아온다. 한 바퀴나 두 바퀴를 돌아서. 그리고 다시, 서로의 몸통을 잡았다가 연달아 놓치는 것. 우리는 우리를 준비시키지 못한다. 자신에게 예시하지도 못한다. 우리의 손이 차례대로 사라지고 차례대로 돋아나는 동안, 쥔 것은 소박한 어둠이며, 그것은 점점 옅어지는 어둠이다. 그런 정도만을 안다. 우리는 어둠에 대해서라면 전부 안다. 그래서 적도 야심도 탁자도 없고, 지도도 잃었던 것인데! 산산이 조각난 유리 배지의 검고 흰 파편들이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빛을 반사시키고 있다.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혜희는 눈을 내리깐 채 웃고 있으며, 귀가 먹을 듯한 굉음 속에서 누구도 그를 신경쓰지 않는다. 하늘이 반으로 잘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