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납골함이 열림

그렇지 않겠습니까?

제가 말해야 하나요? 맞아요. 제가 우유운반자인 데에도 뭔가 의미가 있을까요? 그건 마을에서 매일 아침 우유를 배달했기 때문인데요? 거기에도 뭔가 그런, 세계를 바꾸는 의미가 있었을까요? 하얀 우유병들을 집집으로 옮기는 일에? 맞아요! 저도 알고 있어요. 길잡이 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거의 알 것 같아요. 패자들에 대해 더 이야기해 주세요! 아니면 화자 대리 님에 대해! 또는... 서기들? 서기들은 뭘 하는 사람들이죠? 들어본 적 없어요. 잃어버린 길잡이들은? 제가 모르는 게 너무 많네요. 길잡이 님이 부러워요! 모든 것을 아시는 길잡이 님, 미래마저 아시는 길잡이 님! 당신은 여기에 뭐가 들었는지도 아실 수 있나요?

우유운반자가 나무 상자를 똑똑 두드린다. 그 소리가 어쩐지 음산하게 들린다.

나는 그런 식으로는 모릅니다. 다만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당신이 내게 보여 주고 말해 주리란 사실만을 압니다.

그럴까요? ... 제가 당신에게 더 들어야 할 말이 있을까요?

당신이 듣고 싶지 않다면 없습니다. 말하고 싶을 때 말하십시오.

운반자는 입을 다문다. 한동안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 골짜기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첨병 님이 좀 말씀해 주시겠어요?

좋소.

첨병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시작한다.

우리의 우유운반자가 말한 대로, 길잡이들은 아무 데로나 가오. 길잡이가 되자마자 다들 보고 싶은 것을 보러 가지.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도 길잡이의 작은 권능이오. 실은 엄청난 권능이지. 때문에 길잡이들이 첨병에게 온다기보다는 우리 첨병이 그들을 찾아낸다고 보는 편이 맞소. 어쨌든 당신이 왔다고 해야 길잡이들은 좋아하지만. 그런 판이니 첨병이 길잡이를 잃어버리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고, 어느 정도는 항상 잃어버린 상태요. 하지만 아무리 오래 도망치던 길잡이들도 언젠가는 깨닫게 되오. 첨병을 만나야만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도 나름의 이런저런 갈등이 있겠지만, 난 그게 어떤 마음인지는 잘 모르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평생 잃어버린 길잡이를 쫓다가 명을 달리하는 첨병들도 있다는 사실이오. 끝내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고향에 가봤댔자...라고는 해도 말이오. 나도 쓰러진 첨병 몇을 알고 있소. 그런 면에서 우리 길잡이 씨는 거의 정확히 제시간에 온 셈이오. 단 하루도 늦지 않았소. 이건 정말로 드문 경우요. 어느 정도로 드문가 하면, 근방 길잡이들의 예정 경로가 다 바뀌었을 정도요. 앞으로 첨병의 고향으로 가는 길잡이는 수십 년간 없을 거요. 알다시피, 그것이 내가 여러분과 함께 그곳을 떠나고 있는 까닭이오. 나는 뭔가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이제 느끼고 있소.

이제 느끼고 있소... 첨병의 말소리가 멎자 낙엽 밟는 소리만이 남는다. 어느덧 초롱의 빛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주변은 밝다. 노랫소리도 이제 없다. 아니면 아까부터 없었나? 얕고 혼란스러운 잠에서 깨어난 듯 낱낱 사물의 윤곽들이 날카롭고 차분하다. 첨병의 낡은 신발 뒤꿈치가 분명히 보인다. 그것은 일정하게 단호하게 움직이고 있다. 귓가에 맴돌던 찬송을 속으로만 흥얼거려 본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돌아서서 내려온 길을 올려다보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누른다. 나는 발을 끌어 낙엽들을 헤집으며 걷는 데에 집중한다. 새싹들이 드문드문 드러난다. 두려움이 빠져나간 자리에 밀려드는 것이 있다. 우리가 드디어 검은 골짜기를 통과한 것이다.

길잡이 님, 저는 준비가 됐어요.

돌아설 수밖에 없는 말. 돌아보면 우유운반자가 양손으로 나무 함을 받쳐 들고 있다. 과연 그렇다. 함은 열려 있고, 분홍 보자기는 운반자의 팔뚝에 묶여 있다. 뒤에는 거짓말처럼 웃고 있는 전도자. 그리고 그들 뒤로는 골짜기의 사면. 나는 그 풍경으로부터 약간의 혼란을 느낀다. 우유운반자가 함을 연다. 뚜껑이 떨어진다. 나는 함 속으로 시선을 모으려 애쓴다. 그 속에는 희고 가는 것이 무수히 들어 있다. 작고 흰 나뭇가지들, 첨병의 흰 가지들이 빼곡히 얽혀 있다.

이것은 납골함이에요. 첨병들의 납골함이에요. 첨병들이에요.

우유운반자는 그렇게 말하고 상자를 서서히 기울인다. 첨병의 흰 가지들이 와르르 소리를 내며 쏟아지고, 운반자의 발밑이 잠시 자욱해진다. 연기는 곧 가라앉는다. 축축한 낙엽 바닥 위에 그 더미가 놓여 있다. 원래부터 거기 있었다는 듯, 설산을 흉내 낸 정교한 공예 작품처럼 미동도 없이 쌓여 있다. 나는 안간힘을 써서 시선을 더 모은다. 가지들은 꼭대기로 갈수록 점점 잘아져 분간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고 있다. 그 뒤로는 우유운반자의 무릎. 나는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꼿꼿이 선 채 거리감의 혼란을 느끼고 있다. 나는 이런 일이 어째서 일어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우유운반자가 설산 위로 상자를 던져 갑작스런 마술은 순식간에 어그러진다. 너무나 거대한 것으로 착각되는 상자를 보면서, 뭔가를 한입 가득 물고 있음에도 뭔가가 점점 더 밀고 들어오는 듯한, 절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 목구멍으로 넘어오려는 듯한 기분에 나는 사로잡힌다. 아니면 밖으로 나오려는 듯, 그것이 나의 턱을, 눈과 머리를 터뜨려 버릴 듯한... 나, 길잡이를 해산시켜 버릴 듯한. 대체 무슨 뜻인가?

뭘 그러고 섰어? 처음이라 그래?

전도자가 말한다. 처음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이고 침을 흘려낸다.

불쌍하네. 잘 봐 두라고. 산수라고 하는 거야.

우유운반자의 목소리가 어지럽게 이어진다.

산수라고도 하나요? 여하간 들어 주세요. 길잡이 님, 첨병들은 언젠가 죽어요. 다시는 그를 볼 수 없게 되는 걸 죽는다고 합니다. 그들이 지녔던 가지들도 더는 아무 데도 매달려 있지 않게 되는 거예요. 첨병의 증표 역시 나름의 일을 마치는 것입니다. 남은 첨병들은 그 가지들을 모아 뒀어요. 이 상자 속에. 들어 주세요! 길잡이 님! 고통스럽더라도! 그들에게는 나름 귀중한 물건이기 때문에, 그들이 지녔던 유일하게 귀중한 물건이기 때문에! 이상하게도 증표는 상자 속에서 점점 가늘어집니다. 점점 작아져요. 그래서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죽은 첨병의 증표를 넣을 수 있어요. 이 납골함에 얼만지도 모르는 시간 동안 첨병의 가지가 쌓이고 쌓였던 거예요. 이걸 마을에서 가장 나이 많은 첨병이 맡아 갖고 있다가...

나는 제발 그만하라고 부탁한다. 운반자는 그만하지 않는다.

물려주는 거죠. 물려주는 거예요. 다음, 다음 첨병에게. 마지막에는 저를 키워 준 첨병이 갖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도 떠나 버렸죠. 그리고 제가 받았어요. 제가 그걸 갖고 나왔어요. 이게 그 납골함이에요. 그 일은 이제 끝났어요. 납골은 끝났어요. 산수는 끝났어요!

우유운반자의 얼굴이 맑게 빛나고 있다.